소수서원[紹修書院]
054-634-3310
영주시 순흥문화유적권 관리사무소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2-8
현황파악 안됨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서 부석사 쪽으로 조금 가면, 길 오른편에 소수서원이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사액이란 임금이 현판을 하사했다는 뜻이다). 서원은 선현을 배향하고 교육하는 조선조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의 영정을 모시고제사를 지내는 사당, 학문을 배우고 논하는 강학당, 학생들이 기숙하는 재(齋)가 기본 시설이다.
소수서원은 1543년(중종 36년)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흠모하던 회헌 안향의 사당을 숙수사지에 세우면서 시작된다. 초기의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었으나, 이 후퇴계가 풍기 군수로 부임 하면서 나라의 합법적인 인정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친필로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이어 닦게 한다"란 뜻을 담고 있다.
소수서원의 뒤를 이어 곳곳에 이러한 사액서원이 세워지 되었다.
당시 관학이 흐트러지고 성리학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한 데다 퇴계, 율곡 같은 대학자들이 앞장선데 따른것이다.
소수서원에서는 창건 이후 270여년 동안 임진왜란 때 경상도우병사로 진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김성일, 선조때 좌의정을 지낸 정탁 등 퇴계 문하생 대부분과 유생 4,000여명이 공부했다.
이곳 사료 전시관에는 안향의 일대기를 적은 "회헌선생실기", 서원 원장 등 각 직책을 맡았던 원임들의 인사기록인 "원임제명목",수학한 유생들의 이름을 적은 "입원록", 서원 방문 인사들의 방명록인 "심원록" 등 160여 점이 전시 되고 있다.
소수서원은 처음에 입학정원이 10명이었으나 사액을 받은후 30명으로 늘었다.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유생들이었다.
그러나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에 한 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면 퇴원당했다고 한다.
서원의 입구에 들어서면 평균 300 ~ 500년 이상된 소나무군락이 "학자수"가 되어선비의 굳센 기상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서원앞 500년된 은행나무는 서원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서원을 끼고 도는 죽계수는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영주의 옥토를 적셔 주는 낙동강의 원류이며, 서원 옆 죽계천변에는 경자바위와 서원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경렴정, 취한대가 있다.
소수서원의 출입문을 들어 서면 정면에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쓰인 강학당, 왼쪽에 문성공묘, 전사청, 그리고 강학당 바로 뒤에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있으며, 우측으로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서원 뒤편에는 사료전시관과 충효교육관이 있다.

강학당 (講學堂) 보물 제1403호 이 건물은 원생(院生)들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강당(講堂)으로 중종(中宗) 3년(1543) 주세붕(1495~1554)선생이 건립하였다.
길러낸 원생은 4천여명에 달하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선생 문하생(文下生)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다. 건물의 구조는 팔작(八作)지붕에 넓은마루, 작은 마루와 작은 온돌방이 있다.

학구재·지락재(學求齋·至樂齋)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자리로서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세칸을 꾸몄고, 공부 잘하라는 뜻으로, 건물 입면이 '工'자 형으로 지여져 있기도 하다.학구재(學求齋)는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며, 스승의 숙소와 나란히 세우지 않고 뒤로 물려, 방바닥 높이까지 낮추어 지은 것이 특이하다.
지락재(至樂齋)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일명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하며, 광해군5년(1613) 창석 이준(蒼石 李俊)이 세웠다.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원장·교수들의 집무실로서 양재(兩齋)가 한 동(棟)으로 이뤄진 독특한건물이다.일신재(日新齋)는 일반교수,원임(院任)들이 쓰던 방으로서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뜻으로[대학](大學)에서 딴 것이며,건물 우측 직방재 (右側 直方齋)는 원장(백운동주,白雲洞主)이 쓰던 방으로서 안(內,心) 과 밖(外,行)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 뜻의 [주역](周易)에서 따온 것이다.

일영대(日影臺) 이 석조물은 상·하부(上·下部)의 석재로 이루어진 해시계이다.
맑은날,상부석재 위에 꽂은 막대기그림자가 하부석재위의 12간지(干支)에 드리워지므로 시간을 재던 곳이다.
관세대사당참배시(祠堂參排時)대야를 올려 놓고 손을 씻기위해 만든 석조물(石造物)이다.

정료대(庭燎臺)이 석물(石物)은 요판(燎板)·요주(燎柱)·요대(燎臺)3개의 석재(石材)로 이루어져 밤에 서원(書院)을 밝혀주던 것이다. 함지박 모양의상부석 재위에 관솔을 태원 정원(庭園)을 밝혔다.

회헌영정국보 제111호 이 그림은 조선 명종(明宗) 14년 (1559)에 그려진 회헌 안향(1243~1306)의 영정(影幀)으로 규격은 88.4*53.7cm이다.
안향은 고려중기 문신으로서 고려 충렬왕(忠烈王) 12년(1286) 원(元)나라에 갔을 때 주자서(朱子書)와 주자초상(朱子肖像)을 가지고 와 우리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옷의 윤곽과 주름은 유연한 선으로 간절히 요약하고, 음영(陰影)을 표시하지 않았으며, 안면(顔面)은 붉은선으로 윤곽을 잡고, 역시 가는 선으로 오관 (五官)을 나타내고 있어 예스러움을 보여 주며 전체적으로 학자의 차분한 풍모(風貌)를 잘 나타내고 있다.

주세붕 영정(周世鵬 影幀) 보물 제 717호 이 그림은 조선 중기에 그려진 주세붕(1495~1554)의 영정으로 크기는 134*62.5 cm 이다.
그는 문신(文臣)으로 자(字)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 시호(諡號)는 문민공(文敏公)이다.
중종(中宗) 17년 (1522)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41년 풍기군수 (豊基郡守)로 부임해 간 이듬해 백운동에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사당인 회헌사(晦軒嗣)를 세우고, 이어 1543년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 (白鹿洞學規)를 본 받아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설했다.
그 후 직제학(直提學), 도승지(都承旨),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동지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된 다음, 예조판서( 禮曹判書)에 추종되었으며,인조(仁祖)11년(1633)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향 영정과 이제현 영정등 고려시대의 초상이 우안팔분면(右顔七分面)을 취한 자세를 보이는데 비해 이 주세봉 영정(周世鵬 影幀)은 왼쪽 얼굴이 70%정도 보이고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을 취하고 있으나,
상반신만을 그린 반신상이라는 점과 화면상단의 공간을 남기고 있는 화면 구도 등으로 볼때 안향 영정의 전통에 따라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풍기읍~915번 지방도로~8km~순흥면 소재지~부석사 방면~2km~소수서원 입구
서울출발:풍기~소수서원 시내버스 이용(수시 운행, 20분 소요)
부산출발:영주~소수서원 시내버스 이용(수시 운행, 30분 소요)
상호 : 산내음와인 ㅣ 주소 : 경북 영주시 단산면 영단로 601길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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